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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nal Fantasy 14 본문
(FFXIV OST Burning Wall / Floating City of Nym BGM ( Fleeting Rays ) / 좋아하는 브금!)
1.
나는 좋았던 기억은 쭉 항상 기억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아닌 것 같다. 겨우 20년 하고도 몇 년 더 살았을 뿐인데 흘러가는 시간을 잡지 못하는 기분을 종종 느끼곤 했어서, 싫어했던 건 흘려보내고 좋아하는 건 꼬박꼬박 기록해두기로 했다. 나중에 한 10년쯤 지나서 들춰보면 이것도 다시 새롭게 다가올테니까 말이다. 하여 적어보는 아주 사적인 게임 리뷰.
2.
게임 하나를 이렇게 오래간 했던 적도 참 드물었는데, 길게길게 붙어있었던 게임. 속된 말로 미쳐있었던 게임이었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이 초반엔 마음에 들지 않았는데, 가면 갈수록 정이 들어 결국엔 한 번도 바꾸지 않게 되었다. 이리저리 스크린샷을 찍고 다닐 때면 꼭 개발자가 만든 작은 세상을 여행하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고, 필드에서 들려오는 사운드트랙은 기분 좋은 고양감을 안겨주곤 했다. 신생-창천으로 이어지는 메인 스토리에 푹 빠져서 한동안 다른 사람들의 2차 팬픽션을 읽으며 '정말 좋았지.' 라거나 '맞아, 이 캐릭터는 이 때 이런 생각을 했을 것 같았어.' 라고 생각했던 적도 많았다(홍련에서 다 망하긴 했지만). 게임에 대해서 잘 모르는 와중에 제대로 시작했던 건 이게 처음이라 그런지 조금 더 경험이 값지다. 뭐든 처음이 가장 인상깊으니까.
게임에서 만났던 사람들이랑은 여전히 연락을 하고 있어서, 마치 에오르제아라는 또다른 세상을 통해서 다른 모험가들과 같이 만나 그 연이 쭈욱 이어진 것 같다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물론 좋은 사람들만 만났던 건 아녔지만, 그래도 삶이라는 게 언제나 좋기만 하지는 않기도 하고 많은 추억이 생겼으니까 그걸로 괜찮다, 는 감상! 이 때 찍고다녔던 스크린샷 중, 마음에 드는 건 솎아내어 포토카드로 뽑고 책갈피로 사용하고 있다. 꼭 여행지에서 샀던 풍경엽서를 책갈피로 쓰는 것마냥 말이다.
이제는 제작사에서 좀 이상한 짓을 해놔갖고 영 정도 붙지 않는 데다가, 메인스토리 라인에서 너무나 큰 일뽕과 더불어 제국주의 미화 오리엔탈리즘 색채가 강하게 묻어져 나와 으으 하고 떨어져나온 상태. 언제나 서양 판타지, 특히 용 나오고 마법 나오는 걸 좋아했던지라 아주 인생 끝까지 이걸 좋아할 수 있을 것만 같았는데 그것도 아닌가보다. 오리엔탈리즘 그러게 작작 바를 것이지, 제작사가 그러지 않았다면 아직까지도 좋아하고 있었을텐데!
스샷 찍은 걸 사람들한테 보여주면 "꼭 진짜 여행 하는 것 같네요" 라고 많이 들었어서 내심 뿌듯해하기도 했다. 그만큼 애정이 참 깊었는데 실망이다 제작사…….
3.
하여간 게임을 하며 느낀 전체적인 감상은 그랬고. 스토리 라인 자체는 그런 거다. 이게 타 게임에서도 흔한 이야기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주인공은 왠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으며, 타인의 부탁을 잘 들어주고, 그러면서 어기적 어기적 하다가 어? 하는 사이에 갑자기 영웅적 존재가 되어있는 것이다. 메인을 진행하다보니 언젠가부터 점점 스케일이 소규모 용병길드(비유하자면 그런) 단위가 아니라 국가를 넘어 차원까지 거론되고 있어서, 마치 내가 어떤 거대한 물결 속에서 그 무언가를 지켜보는 것만 같았다. 그 과정에서 도와주는 캐릭터도 있고, 못마땅하게 보는 캐릭터도 있지만 이 무거움 책임감 속에서도 주인공은 꿋꿋하게 앞으로 나아가는(그래야 하겠지 다음 패치를 해야할테니까) 이야기.
가장 각광받는 라인은 신생-창천-홍련 중에서도 단연코 창천의 이슈가르드였으며, 이 전개를 관통하는 테마곡 Dragonsong(신생 에오르제아 스포일러 포함 영상)은 정말 멋있었다. 밀도 높은 배경음을 뒤로한 채 나직하게 감겨오는 보컬의 목소리는 대단한 호소력이 있었고, 가사는 꼭 장편 판타지 소설에서 나올 법한 시구 같아서 굉장한 몰입감을 주었다. 이전 신생 에오르제아의 테마곡인 Answers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노래의 볼륨이 상당히 크다. 이런 아름다움은 유저로 하여금 이야기에 깊이 감화되게 만든다. 잘 짜인 미적 요소는 전개에 일종의 당위성을 심어준다는 말을 아주 공감하게 만들었던 노래들이다. 원곡이 너무나도 압도적 뛰어남을 가진 탓인지, 팬메이드 커버가 별로 없다는 건 조금 아쉽기도 했다.
그런 무형의 미적 요소와, 시각 형태의 맵이 합쳐지다보니 한 번 파판14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다같이 미쳐있는 느낌을 받기도 했다. 떠다니는 섬들, 해적들로 이루어진 항구 도시, 분패치는 눈으로 뒤덮힌 봉쇄된 도시, 황폐화된지 한참인 잃어버린 문명, 저물어가는 용들의 권위 같은, 판타지를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방방 뛸만한 것들이 이렇게 구현되어서 게임을 동안 굉장히 즐거웠다. 각 던전에 얽힌 사연과, 그것들이 지향하는 미의 구현점이 매우 환상적이었다. 그래서 언젠가는 좋아하는 던전에 친구들과 함께 들어가서 나오지 않고 거기서 채팅을 하며 노닥거렸던 적도 있다.
지금은 예전만큼 이 게임을 하진 않지만, 사운드트랙은 여전히 매일같이 틀어놓곤 한다. 오케스트라 콘서트 CD도 샀고, 기회가 된다면 아트북도 사서 이걸 하며 느꼈던 즐거움을 두고두고 곱씹어보고 싶다. 메인 스토리는 정치 존못에 산으로 영 가버렸지만 그래도 잠깐의 시간이나마 이걸 하며 즐거웠고, 덕분에 게임이 이렇게나 재미있는 것임을 알았기 때문에 나름 후회 없는 시간 낭비였다. 다음에도 이런 멋진 게임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210116)
나는 꼼짝없이 양로원에 가서도 파판14 얘기나 하게 생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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