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다락방
19년 4월의 책 본문

황정은, 『白의 그림자』, 민음사, 2010.
190219화 ~ 190402화
20p. 숲
어딘가에서 다름없는 자신의 모습을 목격했다면 그것은 그림자, 그림자라는 것은 한번 일어서기 시작하면 참으로 집요하기 때문에 그 몸은 만사 끝장, 일단 일어선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고는 배겨 낼 수 없으니 살 수가 없다, 는 등의 이야기를 아무 곳에서나 불쑥 말하곤 하다가 그는 귀신 같은 모습이 되어 죽고 맙니다.
황정은의 미친빠 H가 소매넣기로 꽂아준 책. 『백의 그림자』는 H의 말대로 정말 '연애'소설이었다. 주인공은 '무재' 씨와 '은교' 씨. 배경은 현대이지만 특이한 설정이 있다. 바로 그림자. 하지만 그림자가 주가 되는 내용은 아니다. 다만, 그림자를 금방이라도 따라갈 것 같은 아슬아슬한 인물들이, 각자의 사정을 이겨내며 견디는 이야기였기에. 나는 책을 읽으면서 이 사람, 혹은 저 사람이 죽진 않을까 노심초사하며 읽어야 했다.
(144p. 항성과 마뜨료슈까)
살다가 그러한 죽음을 맞이한다는 것은 오로지 개인의 사정인 걸까, 하고 말이에요. 너무 숱한 것일 뿐, 그게 그다지 자연스럽지는 않은 일이었다고 하면, 본래 허망하다고 하는 것보다 더욱 허망한 일이 아니었을까, 하고요.
『계속해보겠습니다』 때도 느꼈던 거지만, 황정은 작가는 사회에서 하층민이라고 불리는 계층의 사람들을 주로 조명하기 때문에 글이 무겁다. 무겁고, 그럼에도 살아 숨쉬는 이들의 이야기를 보고 있노라면 나도 덩달아 견디어 내는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번에도 그랬다. 책을 다 읽을 때까지는, 마치 물 속에서 무거운 숨을 쉬는 것 같았다.
개인적으로는 '가마'의 이야기가 재미있었다. 가마, 가마, 가마 하고 있노라면, 점점 가마 라는 단어가 낯설어진다. 이 낯선 가마들은 모두 각각 다른 가마일텐데 똑같은 가마라고 칭하는 것은 가마에게 폭력적이지 않은가. 처음에는 '이거 무슨 소리지' 하면서 머릿속에 가마가마가마 하는 말만 휘몰아치는 느낌이었지만, 계속 보고 있으니 어째서 이런 이야기가 나온 것인지 이해하게 되었다.
소설이 말하는 그런 달동네, 재개발구역의 사람들도 그들의 삶이 분명 있을텐데. 사회는 그들을 그저 '달동네 거주민', '재개발구역 사람들'이라고만 통칭하며 똑같은 것이라 일축한다. 이건 그들에게 너무 잔인하지 않은가.
후기를 조금 더 적어도 될만한데 해설은 책 뒤쪽에 다른 작가가 이미 모조리 해주었으므로 감상은 짧게 남긴다. 아래는 가장 인상깊었던 구절이다.
노래할까요.
노래할까요, 우리. 비록 이따금 슬픈 일이 많은 것 같은 삶이라도 그림자를 따라가지 않기위해, 같이 노래할까요.
틸 뢰네베르크, 『시간을 빼앗긴 사람들』, 유영미 옮김, 추수밭, 2011.
190129화 ~ 190428일
평범하게 sns를 하면서 재미있는 것들은 쑉쑉 RT를 하던 도중, 흥미로운 글을 보게 되었다. 수면이 자꾸 조금씩 밀려서 결국 늦은 새벽이나 아침에 자게 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다는 것이었는데. 그게 수면위상지연증후군(Delayed sleep phase syndrome, DSPS)이라는 걸로 명명이 이미 되었다는 말이었다. '아니 이건 완전 나잖아?' 했고, 반드시 봐야겠다 싶어서 도서관에서 빌려 보았다.
전체적으로 인간의 생체패턴에 관한 책이다. 아무래도 내 주변 친구들 및 지인들이 하나같이 이른바 '예술가형' 생체패턴을 가졌기에 언제나 궁금했다. 대체 아침형 인간은 어떤 삶을 살까? 왜 사람들마다 그런 특징이 있을까? 이런 것들이 선천적으로 생긴걸까? 같은 것들.
특히 재미있었던 부분은 벙커실험이다. 낮과 밤을 알 수 없게 만들어둔 벙커에 실험 참가자들을 두고, 일정하지 않은 주기로 음식을 가져다준다. 그렇게하면 참가자는 외부시간을 전혀 알 수 없게 되기 때문에, 태어날 때부터 내재되어있던 본인의 생체시계로 움직이게 되는데 이게 24시간으로 딱맞아 떨어지지 않았다! 대개들 2~3시간씩 차이가 났다. 이걸 보며 조금씩 수면이 밀리는 사람들이 왜 그랬는지 조금 더 이해하게 되었다.
'수면'에 대한 책이었기 때문에 단지 그런 이야기만 나오겠지, 라고 생각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되었다. 수면은 꽤 많은 것들과 연관되어 있었다. 계절, 해가 뜨고 지는 시간, 도시의 빛공해 등과 상당한 연결고리가 있었으며 부적절한 수면 등은 우울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280p. 23. 생긴대로 사는 법)
청소년들이 텔레비전을 너무 많이 보고 디스코텍에서 '빈둥거리다 보니'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지 못해서 첫 시간 수업이 힘든 것이라고 확신하는 정치가들과 교사들을 생각해보라. 그들은 대부분 빠른 시간유형 내지 잠시 적은 사람들이 아닐가? 의사결정자들은 사회적 시차로 고생하는 사람들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에 시스템을 변화시킬 이유를 결코 못 보는 것이다.
각자 누구나 갖고있는 시간유형이 있다. 어떤 이는 올빼미형이고 어떤이는 종달새형이다. 그게 단지 '노력만으로' 휘리릭 바뀔 수는 없다. 옮긴 이의 글이 마침 재미있고 인상깊어 덧붙여본다.
(300p. 옮긴이의 글)
얼마 전 아들이 넋두리처럼 친한 친구가 아침에 등교해서는 자신이 무슨 말을 해도 화난 사람처럼 무반응이라고 전했다. 그러다 오후가 되면 즐겁게 말을 걸어온다고 했다. 때마침 이 책을 작업하던 나는 옳거니 하고 이 책에서 얻은 지혜를 아들에게 전수해주었다. 그 친구가 네게 무슨 감정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 아니니 오해하지 말고 아침에는 절대로 그 친구를 귀찮게 하지 말라고…….
우리 모두 특정 시간에 유독 집중이 안 된다거나 멍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본래는 그게 아마 당신이 잠을 자야만 하는 시간일테다. 각자의 수면패턴을 존중하고, 일찍 일어나는 종달새만이 인생의 승자라고 단정짓지 말자. 올빼미들은 자신의 수면패턴이 틀린 것이라 무작정 단정짓지 말고, 종달새들은 올빼미를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모멸적으로 보지말자. 우리는 그저 각자의 수면리듬이 다른 것 뿐이니까.
베셀 반 데어 콜크, 『몸은 기억한다: 트라우마가 남긴 흔적들』 제효영 옮김, 김현수 감수, 을유문화사, 2016.
180304월 ~ 190502목
읽는데 정말 힘들었다. 글의 무게가 있어서 힘들었다는 문제가 아니라, 너무 두꺼워서 힘들었다. 약 650쪽 가량의 정말 길고 자세한 책이며, 그중 100쪽 정도는 참고문헌이지만 그래도 여전히 550쪽을 읽어야 한다는 사실이 변함이 없어서 힘들었다. 다만 참고문헌이 수록된 양만큼, 아주 잘 감수된 트라우마에 관한 자료가 빼곡하게 실려있다. 그저 '트라우마를 조금 더 이해해봐야지'라는 생각에 가볍게 보기 시작했다가, 인간 전반에 대한 참을성 같은 게 늘어났을만큼 괜찮은 책. 생각보다 많은 것들은 과거, 혹은 환경의 영향이며 인간은 그로부터 처음부터 자유롭기 어렵다.
(101p. 4장 필사적인 도주: 생존의 해부)
트라우마 생존자들은 "지속적으로 행동을 취하거나 사건 당시 시작한 행동을 계속하려는 (헛된) 시도를 이어간다"는 그의 견해가 수용되고 있다. 끔찍한 경험을 한 후, 그 일에서 벗어나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는 무언가를 '실행에 옮길 수 있는지' 여부가 그 일이 오래도록 지속되는 상처로 남을 것인지 결정하는 중대한 요소로 작용한다.
(388p. 14장 언어, 기적이자 고통)
비합리적인 사고는 트라우마 사건의 잔재다. 즉 그 트라우마 사건이 일어난 상황 혹은 그 직후에 했던 생각들은 스트레스가 높은 상황에서 다시 활성화된 결과다.
(514p. 19장 뇌 회로의 재연결: 뉴로피드백)
아동기에 만성 학대와 방치를 경험하면 감각 통합 시스템이 제대로 형성되지 못한다. 어떤 경우에는 이로 인해 청각과 단어 처리 체계가 제대로 연걸되지 못하거나 손과 눈의 협응이 비정상적으로 이루어져 학습 장애가 발생할 수도 있다. 입원 치료 프로그램에 참가한 청소년들은 굳어 버린 상태나 감정을 폭발하는 상태로 머물러 있는 한, 일상생활에서 획득한 정보를 처리하면서 얼마나 심각한 문제를 겪는지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행동 문제가 치료된 이후에 학습 장애가 드러나는 경우가 많다. 트라우마를 겪은 아이들은 겉보기에 가만히 앉아서 집중하는 모습을 보이더라도 학습 능력이 떨어지는 경우가 빈번하다.
읽는 건 정말 힘들었지만 남는 게 많았던 독서였다. 이따금 '쟤는 왜 저런 생각을 하지? 당연히 저러면 안될텐데.' 같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사람들이 있다. 그걸 이해할 수 없는 것으로 치부하고 그저 이상하다, 철이 없다는 등의 낙인을 찍어버리면 안 된다는 교훈을 얻었다. 아직 한국의 양육방식은 아이를 제대로 이해해주지 못하고, 폭력 상황에 노출된 아이들이 많으며, 그들을 잘 지탱해줄만한 사회적 그물망도 그닥 없는 실정이다. 이런 사회, 특히 교육조차 잘 성립되어 있지 않은 폭력 가정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비합리적 사고를 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많을까?
좋지 못한 환경에서 태어났다면 필히 거기서 벗어나기 위한 최소한의 발버둥 정도는 쳐야 한다고들 말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러한 시선이, 폭력에 노출된 아이들은 당연히 중산층 이상의 아이들보다 더 열심히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말로 들린다. 이런 노력에 대한 사회적 함의는 점점 아이, 혹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을 옭아맨다. 우리는 얼마나 타인의 고통을 이해할 수 있을까.
(137p. 5장 신체와 뇌의 유대)
좁은 범위로 한정한 희생자 집단 속에 자신을 고립시키면,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은 기껏해야 무관한 존재가 되고, 최악의 경우 위험한 대상으로 여기게 되어, 결국 고립감이 더욱 심해진다.
개인적으로 왜 '우울증 환자 집단이 의사의 돌봄 없이 같이 모이면 안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해결되었던 문장이다. 그리고 어째서 아픈 과거를 가진 사람이, 또 아픈 과거를 가진 사람에게 끌려 비극으로 치닫는 경우를 보게 되는지 알게 되었다. 내심, 그렇게 힘든 얘기 서로 하고 있는 게 한두번도 아니고 10번, 20번을 넘어가면 그닥 그 사람과 대화를 하고 싶지 않다는 느낌이 들었을 때가 많았다.
하지만 서로 힘들고 슬펐던 이야기를 하며, 언제나 그런 대화만을 반복하며 만남을 지속하는 관계가 있다. 그런 걸 보고 있노라면 '대체 왜 저렇게 살아…….'라는 생각을 굉장히 많이 했었는데, 발췌문에서 해답을 찾은 느낌.
(515p. 19장 뇌 회로의 재연결: 뉴로패드백)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환자들이 극복해야 할 문제중 하나는 새로운 가능성을 진심으로 믿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래야 현재를 끊임없이 되살아나는 과거로 해석하지 않는다.
트라우마에 노출되었던 사람이 비합리적이고, 감정적이고, 미래를 내다보지 않는 행동을 하며 주변인을 고통스럽게 한다면. 최소한의 대책, 혹은 미래로 나아갈 수 있다는 소소한 지지를 건넬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이미 트라우마를 가진 사람으로 자라버렸기 때문이다.
분량이 너무 많아 부담스럽지만, 다들 살아가며 한 번쯤은 보면 좋겠다. 내가 주로 독후감에서 다룬 건 큰 트라우마나 아동기에 겪은 폭력 등등이지만, 이 책에는 그것에서 어떻게 발버둥쳐서 더 좋은 미래를 향해 나아간 사람들의 이야기도 많이 나온다. 어쩌면 모든 사람의 일생에 녹아있는 것이 상처이고 흉터니까. 과거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를 더 깊이 관찰하고 정리해야한다는 아이러니를 마주해야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추천할만한 책.
아............ 너무 길다.... 다시는 600쪽짜리 책을 재미로 과제 많을 때 대출하지 않겟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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